반도체 하면 기술 경쟁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나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공정거래위원회가 글로벌 비메모리 반도체 기업 NXP와 ADI를 상대로 심사보고서를 송부했다는 뉴스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기술이 아니라 유통 구조와 가격 결정권 문제였거든요. 관련 매출액만 약 4조 7000억 원, 최대 과징금은 1880억 원에 달하는 사건입니다.
삼성·엔비디아만 보다가 놓친 것 — 비메모리 반도체 유통구조
솔직히 고백하면, 저는 반도체 뉴스를 볼 때 항상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엔비디아 같은 이름만 쫓았습니다. HBM(고대역폭 메모리), 파운드리(위탁생산) 같은 키워드가 뜨면 바로 클릭했고, NXP나 ADI는 솔직히 이름조차 낯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파고들다 보니 제가 반도체 산업의 절반쯤은 못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비메모리 반도체(System Semiconductor)란 연산, 제어, 통신 등 특정 기능을 수행하도록 설계된 반도체를 말합니다. 우리가 타는 자동차, 집에 있는 가전, 매일 쓰는 스마트폰, 자율주행 시스템까지 거의 모든 전자 기기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NXP는 국내 자동차용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 1위 사업자이고, ADI는 글로벌 아날로그 집적회로(Analog IC) 시장 2위 사업자입니다. 아날로그 집적회로란 온도, 압력, 소리처럼 연속적으로 변하는 신호를 처리하는 반도체 부품으로, 산업 장비나 의료기기에도 폭넓게 쓰입니다.
이 두 기업이 한국 시장에서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는지 생각해 보면, 이번 사건이 단순한 기업 간 분쟁이 아니라는 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자동차 제조사나 가전 기업이 부품을 살 때 거쳐야 하는 유통사 단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게 핵심이었습니다.
승인 한 번으로 가격을 쥐다 — S&D 거래방식의 두 얼굴
이번 사건의 핵심 쟁점은 S&D(Ship & Debit) 거래방식입니다. S&D란 반도체 제조사가 유통사에 표준 공급가격을 제시한 뒤, 유통사가 특정 고객에게 할인 판매할 필요가 생기면 제조사의 승인을 받아 낮은 가격에 팔고 차액을 나중에 돌려받는 방식입니다. 처음 설명을 읽었을 때 저는 "유통사가 손해 안 보고 고객에게 경쟁력 있는 가격을 줄 수 있는 좋은 제도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승인' 과정에 있었습니다. 공정위 심사관은 NXP와 ADI가 승인권을 이용해 유통사의 거래처, 마진율, 재판매가격까지 사실상 통제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매가격유지행위(RPM, Resale Price Maintenance)란 제조사가 유통사에게 최종 판매가격을 정해주고 이를 강제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공정거래법에서는 이런 행위가 유통사 간 가격 경쟁을 없애버리는 대표적인 위반 유형으로 봅니다.
제가 직접 겪어본 건 아니지만, 가격 협상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시장 구조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어느 정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 앞 편의점 두 곳이 경쟁하면 가격을 낮추게 되는데, 만약 본사가 "절대 이 가격 이하로 팔지 마라"고 못을 박아버리면 소비자는 무조건 그 가격을 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구조입니다.
이번 혐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NXP: 최소 2012년부터 특정 유통사가 거래처를 먼저 확보하면, 다른 유통사는 그 거래처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혐의 — 사실상 독점 유통권 부여
- NXP: 유통사들이 확보할 수 있는 마진율을 사전에 정한 혐의
- ADI: 최소 2020년부터 유통사 마진율을 사전 고정하고, 거래처에 대한 재판매가격을 지정·강제한 혐의
NXP의 거래상대방 제한행위 관련 매출액은 약 8억 8000만 달러(한화 약 1조 3000억 원), 경영간섭 행위 관련 매출액은 약 6억 6000만 달러(한화 약 1조 원)으로 산정됐습니다. ADI의 경영간섭 및 재판매가격유지행위 관련 매출액은 각각 약 8억 달러(한화 약 1조 2000억 원)입니다. 이를 모두 합치면 약 4조 7000억 원이고, 공정거래법상 최대 4%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으니 단순 계산으로 최대 1880억 원 수준이 됩니다.(출처: 공정거래위원회)
과징금 1880억보다 더 중요한 것 — 반도체 공급망의 공정성 전망
이번 사건을 보면서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숫자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공정위가 이 문제를 들여다보게 된 배경, 즉 반도체 공급망(Supply Chain) 안에서 누가 가격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는가라는 구조적 질문이었습니다. 공급망이란 원자재 조달부터 최종 소비자에게 제품이 전달되기까지의 전체 과정을 뜻하는데, 반도체처럼 핵심 산업 부품의 경우 이 구조가 조금만 틀어져도 국내 제조업 전반에 파급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글로벌 반도체 제조사가 S&D 방식으로 운영하는 게 국제적 관행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이게 그냥 업계 표준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르게 봐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관행이라는 이름이 붙더라도, 그 과정에서 유통사의 독립적인 영업활동과 가격 결정권이 실질적으로 박탈된다면 법적 판단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특히 국내 유통사 입장에서는 NXP나 ADI 같은 글로벌 기업을 상대로 협상력이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계약서에 서명했다고 해서 대등한 협상이 이뤄진 건 아닐 수 있습니다.
현재 공정위는 심사보고서를 송부한 단계이고, 최종 위법 여부와 제재 수위는 전원회의 심의를 거쳐 결정됩니다. 기업 측은 서면 의견과 증거를 제출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비슷한 유형의 사례로, 유럽연합(EU)은 반도체 유통 분야에서의 경쟁제한 행위에 대해 꾸준히 제재를 강화해 왔으며, 이는 국내 규제 방향에도 참고가 됩니다.(출처: European Commission 경쟁정책)
그때 느낀 건, 공정거래 규제가 단순히 기업을 벌주는 수단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반도체 부품을 사야 하는 국내 제조업체가 경쟁적인 가격을 받을 수 있는 환경, 유통사가 스스로 영업 전략을 세울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 결국 국내 산업 전체의 비용 경쟁력과 연결됩니다. 기술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큼, 부품을 사고파는 구조가 공정한지도 중요하다는 걸 이번 사건으로 처음 실감했습니다.
이번 공정위의 움직임이 어떤 결론으로 이어지든, 반도체 유통시장에서 가격 결정권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향후 위원회 심의 결과가 나오면, 단순히 과징금 액수보다 유통사와 구매 기업에 어떤 실질적인 변화가 생기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공정거래위원회 공식 발표를 직접 확인해 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법률 또는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 참고: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8/0006325298
